실크 스타킹 (Silk Stockings)를 보다

실크 스타킹 (Silk Stockings)



제목이 주는 세련과 퇴폐의 이상한 앙상블도 그렇거니와 

1957년의 이 오래된, 무려 반세기를 치고 내려가야만 만날 수 있는 

이 영화를 언급하는 이유는 아마도 나에게

시대의 아이콘과 패러다임을 이토록 적절히 회상시킬만한 영화가 근래에 없던 이유일까...

 



1957년작 '실크 스타킹'은 미국도 소련도 아닌 '파리'라는 전후 문화적 중립지에서

미국의 영화제작자와 소련 공산당원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것을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도입부(部)부터 재밌는 패러다임을 제공하는데 이 둘이 만나게 되는 소재가

파리에서 활동하는 소련출신 작곡자 보로프에게 미국출신 영화제작자 캔필드가 영화음악을

의뢰하면서부터라는 점이다.



문화생성양식이 자본 그 자체에 집중해 자본소유자, 즉 대중을 그 소비대상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내야 하는 미국이라는 국가.

예술가의 활동 그 자체를 인정해 국가적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던(사실은 이 영화에서

비꼬는 것처럼 선전효과 - Propaganda 였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겠지만) 소련.



이 두 국가의 기묘한 동침을 선언함으로 (오프닝이 신문에 실린 기사를 주인공 캔필드가 슬쩍

걷어차면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공산주의자에게 있어 이것이 Propaganda 를 기대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자에게 있어 이건 단순히 발에 채이는 신문의 뉴스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문제를

야기시키고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뮤지컬 영화다. 감독은 Rouben Mamoulian 이라고 우리에게는 그다지 친숙하지는

않은 이름이지만 Maurice Cheval‎ier 와 Jeanette MacDonald 라는 에른스트 루비치의 콤비로 유명한

두 사람이 주연한 'Love Me Tonight' 이라던가 그레타 가르보 주연의 '크리스티나 여왕' 등으로

헐리우드의 유능한 고용감독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이 작품이 뮤지컬이란 점에 주목해야할 것은 아마도.. 감독만 빼고 전부다..다!

 




좀 심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는 50년대 헐리우드 뮤지컬이 탄생시킨 중요 아이콘 전부를

소유해버리는 신기한 영화다. 우선 제작사부터 보자. MGM.. 이건 숫제 말하나마나다.

'오즈의 마법사','singing in the rain', Gigi', '파리의 아메리카인', 'That,s Entertainment!',

'Band Wagon' 등등... 아무리 말해도 멈추지 않고 넘쳐나는 뮤지컬의 봇물같은 제작사다.

그런데 사실은 MGM 이 뮤지컬 제작사의 대명사가 된 것에는 좀 다른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 바로 첫번째 아이콘 아서 프리드(Arthur Freed)가 존재한다.

 

 아서 프리드는 뮤지컬 그 자체와 함께 첫발을 내딘다. 헐리우드 최초의 뮤지컬로 알려진

'브로드웨이 멜로디'(1929)(이것도 MGM..)의 영화음악을 맡아서 작업을 시작했으니 두말할 것도 없다.

칼라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개업파티같은 뮤지컬 '오즈의 마법사'(1939)로부터 소녀에서 여자로 변해가는

성장영화 '지지'(1958)에 이르기까지 그가 제작한 작품들은 뮤지컬 장르에 확고한 가지들이 되어갔다.

스스로 뿌리가 되어 땅속으로 깊게깊게 밀려들어가는 동안 가지는 풍성하게 자라 4-50년대 헐리우드를

그 자신의 그늘 아래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소유한 확고한 뮤지컬 팀에 의해 춤과 노래,

연기의 불투명한 삼박자가 계산된 연출에 따라가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MGM Presents - Arthur Freed Production' 이라는 오프닝 로고만으로도 뮤지컬 장르에서는

70% 이상 먹고 들어간다고 해도 전혀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덕분에 50년대 뮤지컬 전성기 그 자체가 아서 프리드의 은퇴(영원으로의)와 함께

쇠락을 맞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덧붙여 또 하나의 아이콘 콜 포터(Cole Porter)가 등장한다. 'Kiss Me, Kate' 에서 'Les Girls' 에

이르기까지 뮤지컬작곡가 콜 포터가 남긴 주옥같은 명곡들은 아직도 미국인들 가슴속에 남아

2004년에는 콜 포터의 생애를 영화화한 'De-Lovely'라는 작품까지 만들어질 정도니..

이 인물에 대한 것은 역시 말 대신 이 영화를 보는 것으로 대신하자.

 

그리고 여기.. 뮤지컬 무비와 그 이름을 분리해서 언급하기 힘든 세번째 아이콘 '프레드 아스테어'가 있다.

사실 키도 크지 않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얼굴에 몸은 약간 빈약해보이기까지 하는 이 인물.

대체 이 인물은 어떻게 뮤지컬 그 자체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그가 진정한 엔터테이너였기 때문이다.

누가 그만큼 춤을 추고 연기하고 노래할 수가 있던가? 정확한 스텝, 유연한 제스츄어, 달콤한 노래, 유쾌한 연기.

이만큼 할수 있는 인물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을 수가 있을터인가.

 




사실 뮤지컬에 있어 Actor 로 우리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 켈리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들은 분명 확고부동한 뮤지컬 아이콘이었지만 솔직한 심정의 나로선 진 켈리가 아닌 프레드 아스테어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 켈리는 혼자 감당하는 Actor 이지만 프레드 아스테어는 함께 하는 Actor 이기 때문이다.

뮤지컬을 오랫동안 봐왔을 때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주제가 신기할 정도로 두 연인의 '사랑'에

집중되어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건 뭐랄까.. '편애'에 가까울 정도다.

덕분에 우리는 뮤지컬 장르에서 남녀 Two Shot 으로 이루어진 시퀀스를 아주 쉽게,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투샷의 지점에서 진 켈리와 프레드 아스테어의 차이가 극명해진다.

진 켈리는 탭댄싱을 위주로 힘있는 애크로배틱 Action 을 뮤지컬 장면에서 보여주는가 하면

프레드 아스테어는 재즈댄스 위주의 정확한 스탭에 의존해 부드럽고 유연한 동작을 위주로 뮤지컬을 하고 있다.

진 켈리는 같은 동작의 남자 투샷에서는 어울리지만 여자와 함께 하는 투샷에서는 너무 강하다.

이에 비해 아스테어는 혼자놀기도 잘하지만 사실은 투샷에서 혹은 군무장면에서

그 진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타입이다.

그래서 아스테어는 대체적으로 혼자 언급되기 보다는 콤비로 더 유명하다.

'Ginger & Fred' 라는 영화를 펠리니가 괜히 만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 'Silk Stockings'이 cinemascope 비율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실은 뮤지컬 영화의 상당수는 스탠다드 비율에서 만들어졌다. 나중에 cinemascope 가 유행하면서

비율이 확장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심지어 뮤지컬의 명장면을 모아 한편의 영화로 만든

'That's Entertainment' 에서는 4;3 비율의 위아래를 잘라내 와이드비율에 맞추기까지 한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편협심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비평은 그런 것조차 가정하에 둔다고 생각한 채

문제제기를 하나 할까 한다. 정말 사소할 수 있을텐데 스탠더드 비율에서 생각되는 Actor 가 진 켈리라면

 cinemascope 비율에서 생각되는 Actor 는 분명 프레드 아스테어다.

물론 cinemascope 뮤지컬 영화에 대표적으로 꼽히는 작품 'Brigadoon'에서 우리는

진 켈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영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진 켈리의 독무나 협무가 아닌

마을 사람들의 군무라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더더군다나 진 켈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조차 시네마스코프의 좌우 시선을 채우는 넓은 화면을,

진 켈리와 파트너가 추는 4;3 비율의 공간만을 활용하고 남은 공간을 그저 배경그림으로 써버리는 실례라니...



사실 이건 영화제작에 있어 낭비라고 해야맞을 것이다.

이에 비해 프레드 아스테어는 확실히 4;3 비율에서도 탁월한 Actor 였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4;3 이 너무 짧다.

그는 마치 바닥에 스탭을 그려놓고 움직이는 거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확한 스태핑을 보여주는데,

'쉘 위 댄스'나 '댄서의 순정'이 그저 춤을 배워나가는 즐거움을 보여주는 정도라면, 이것이 프레드 아스테어에

도달하게 되면 이렇게 배워온 댄스가 영화에서 어떻게 완벽히 접목되는가는 보여주는 레퍼런스 모션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정교한 스태핑을 통해 긴 화면에서조차 전혀 부족한 없는 넓은 스텝과 그 스탭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주변 설치물과의 제스츄어(Band Wagon 은 4:3 이건만 이 작품에서의 그의 행동반경을 보았을 때

이 비율이 얼마나 짧아보이는가), 군무에서도 따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오히려 군무의 일부가 되어 넓은

화면을 좌우로 빽빽하게 채워나가는 이 탁월한 재능이야말로 그를 최후의 최후까지 '뮤지컬 배우' 로

인도하는 바로 그것이었던 셈이다. (코폴라의 68년도 뮤지컬 'Finian's Rainbow'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줄이야..)

이 영화에서의 파트너 Cyd Sharisse 역시 'Band Wagon'에서 함께 했던 콤비로서

호텔방에서 의상을 갈아입는 장면으로부터 뛰어난 안무실력을 엿볼 수 있으며,

보로프의 'Red Blues' 로부터는 군무의 즐거움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실 감독이 빈센트 미넬리였다면 A-Z까지 완벽한 코드였을거라는 생각도 감히 하게 되지만,

감독 Rouben Mamoulian 이 소련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해 고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선택도 그다지 마이너스라고 평가할 수 없다.

 제목 'Silk Stockings' 이 가진 의미가 이 영화에서는 두가지 요소를 안고 사용되어진다.

첫번째는 제작되는 영화의 주연여배우가 작곡가 보로프를 유혹하면서 노래하는,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가장 좋은 무기.

두번째는 특파 공산당원 니나가 호텔방에서 은밀히 실크 스타킹을 입어보며 갈망하는 '자유'에 대한 상징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이제 소련에 대해 그다지 곱지않은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본국에 돌아가지 못해서 'Too bad' 라고 외치는 주제에 흥청망청 여자와 노는 소련 감시자들이라던가,

전임 문화성 위원장의 장기휴가라는 말을 듣자 처형이라고 미리 판단하는 모습이라던지,

신임 문화성 위원장의 발레리나와의 불륜행각 등 정말 소련에 대해 'Too bad'한 이미지만 심어주고 있다.

 

57년 맥카시 열풍이 막 잠들던 시대에 자해석적으로 경건주의를 깔고 이를 비웃듯이 소련을 그려나가는

뮤지컬이라니..

과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제 50년을 지나버린 후에 이것은 그저 우스꽝스러운 하나의 '패러디'에

불과할 지도 모르지만, 현실은 광풍은 50년동안 변함없이 흐르고 여전히 여피 '부쉬'가 집권하는 시대에

어쩌면 50년은 헛되이 흘러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감시자 역할로 등장하는 3명의 공산당원 중 키가 유독 작은 한명이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면 상황은 바뀔 것이다.

이 사람, 바로 피터 로레.

프릿쯔 랑의 영화 'M' 을 기억해낼 수 있다면 이 인물 반갑지 않을리가 없다. 이래서 영화는 또한 즐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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